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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선 (18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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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윤영선(1896년)은 1896년 서울에서 태어난 대한민국의 기업가, 교육자, 사회운동가이다. 윤치호의 아들이자 윤웅렬의 손자로, 한영서원을 졸업하고 미국 유학 후 농업과 목축업을 경영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송도고등학교 부설 농장과 목장을 운영하며 기업 활동을 했고, 광복 후에는 고려제약 전무, YMCA 총무, 송도학원 이사장 등을 역임하며 사회 활동에 헌신했다. 1982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으며, 1988년 9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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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선 (1896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24년 윤영선
한글윤영선
한자尹永善
로마자 표기Yun Yeongseon
아호오당(梧堂)
한자 아호梧堂
로마자 표기 아호Odang
출생 및 사망
출생일1896년 12월 25일
출생지조선 한성부 종로구 전동 (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견지동 68번지)
사망일1988년 2월 6일
사망지서울특별시 종로구 견지동 46번지
학력
학력오하이오 주립 대학교 농축산과 학사
경력
주요 경력고려제약 부사장
고려제약 사장
송도학원 이사장
제3대 농림부 장관
정치 경력
직책제3대 농림부 장관
임기 시작1950년 1월 21일
임기 종료1950년 11월 22일
대통령이승만
가족 관계
아버지윤치호 (일본 귀족원 의원)
어머니마애방
배우자민연희
자녀아들 윤영구, 윤승구
친척할아버지 윤웅렬, 이복 숙부 윤치왕, 윤치창, 당숙 윤치소, 윤치오, 윤치영, 6촌 조카 윤보선, 윤원선
기타 정보
종교유교 → 개신교
창씨명이토 나가센(伊東永善)
정당무소속
웹사이트해평윤씨 홈페이지

2. 일대기

윤영선은 1896년 12월 25일 조선 경성부 종로방 전동(현재의 종로구 견지동 68번지)에서 윤치호와 마애방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18세기 중엽까지 명문 양반가문이었으나 이후 향반(鄕班)으로 몰락했다가, 증조부 윤취동과 조부 윤웅렬, 종조부 윤영렬이 관직에 오르며 다시 가세를 일으켰다.

어려서 한학을 배우다가 아버지 윤치호가 설립한 한영서원(송도고등학교의 전신)에 입학하여 영어와 낙농, 목축 과정을 수학했다. 소년기에 민유식(閔裕植)의 딸 민연희(閔蓮禧)와 결혼했다.

1914년 한영서원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마운트 헤르몬 중학교를 거쳐 밴더빌트 대학 농업과에 입학했다. 1917년 오하이오 주립 농업전문대학 농축산과에 입학했고, 1922년 졸업 후에는 농림연구소 연구보조원으로 근무했다.

1922년 6월 귀국 후 개성 고려청년회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1923년부터 송도고등학교 부설 송고 농장과 송고 목장을 경영했고, 한영서원 재단 이사 겸 농장, 목장 관리인을 겸했다. 1923년 1월 개성 일본 경찰서에 목장사업 인가를 신청했으나 거절당했다.

1927년 6월 18일 주식회사 송도식산(松都殖産) 설립에 참여하여 이사가 되었다. 1929년 2월 18일 주식회사 송고실업장(松高實業場) 창립에 참여하여 주주 겸 이사가 되었다. 10월 30일 장연전기 주식회사를 설립하고 공동대표로 출자하였다.

1931년 3월부터 1933년 3월 31일까지 황해도 장연의 전등, 전력공급 업체 장연전기(주)의 공동대표이사를 역임했다. 1932년 송도중학교 재단이사에 취임하고, 1933년 송도소학교 교장에 취임했다.

1937년 12월 오른쪽 다리에 종기가 발생했다. 1939년 유일한 등이 설립한 유한양행 주주로 참여하였다. 1940년 조선 총독부의 창씨개명령에 따라 이토 나가젠(伊東永善)으로 창씨개명하였다. 1940년 7월 주식회사 경인기업(京仁企業) 상무이사에 취임했다. 1941년 11월 7일 경인기업 감사가 되어 1942년 8월 31일까지 재직했다.

1945년 광복 후 고려약품주식회사 전무 취체역이 되었다. 1946년 3월 29일 고려제약위생회사 부사장에 취임했고, 9월 22일 남대문 자유시장 개장식에 사회자로 참석하였다.

1948년 개성시약학대학 유치 운동을 추진했으나 6.25 전쟁으로 실패했다. 1949년 10월 26일 대한적십자사 대의원으로 위촉되었다.

1952년부터 쌀 생산량 부족으로 이승만 정권에서 주조금지법 제정과 엿 제조 금지법을 건의하였다.

1956년부터 흥사단 금요강좌의 연사로 초빙되었다. 1957년 농업은행(농협의 전신) 중앙회의 운영위원에 선임되었다. 1957년~1958년 서울 로터리클럽 회장을 역임했다. 1958년~1959년 YMCA 청년회 총무를 역임하였다.

1960년 이후 보이스카우트 활동에도 참여했다. 1960년대 이후 4H클럽중앙위원회 회장, 대한적십자사 비서실장을 역임하였으며, 학교법인 송도학원 이사장으로 재직하였다.

1968년 1월 연세대학교 박물관에 아버지 윤치호 및 할아버지 윤웅렬의 유품 등을 기부하였다. 1975년 5월 2일 구국동지회(救國同志會) 창립 발기에 참여하였다.

1982년 송도학원이 경영난에 처하자 이회림(李會林)에게 재단을 넘기고 은퇴하였다. 1988년 2월 6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견지동 자택에서 노환으로 사망했다.

2. 1. 초기 활동

오당 윤영선은 1896년 12월 25일 조선 경성부 종로방 전동(현재의 종로구 견지동 68번지)에서 윤치호와 중국 여인 마애방의 아들로 태어났다.

조부 윤웅렬(왼편 담배 피우는 이)


그의 집안은 18세기 중엽까지 명문 양반가문이었다가 그 뒤 향반(鄕班)으로 몰락하였으나, 증조부 윤취동이 지중추부사가 되고 조부 윤웅렬과 종조부 윤영렬무관으로 출세하여 다시 가세를 일으켰다. 그가 태어날 무렵 할아버지 윤웅렬과 아버지 윤치호는 개화파 정치인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어려서 한학을 배우다가 아버지 윤치호가 설립한 한영서원(송도고등학교의 전신)에 입학하여 영어와 낙농, 목축 과정을 수학했다. 소년기에 민비의 친족인 민유식(閔裕植)의 딸 민연희(閔蓮禧)와 결혼했다.

2. 1. 1. 생애 초반

오당 윤영선은 1896년 12월 25일 조선 경성부 종로방 전동(현재의 종로구 견지동 68번지)에서 태어났다. 그는 조선과 대한제국의 계몽사상가이자 민권 운동가였던 윤치호와 중국 여인 마애방의 아들이었다. 어려서부터 기독교 신자였다. 어머니 마애방은 아버지 윤치호갑신정변 실패 후 청나라 상하이로 망명했을 때 만나 결혼했다. 윤영선 위로는 누나 윤봉희가 있었고, 바로 아래로는 일찍 요절한 동생 봉선과 광선이 있었다. 동생 윤광선은 아버지 윤치호의 비서 일을 보았고, 해방 후에는 미군정청 통역관으로 근무했으나 1950년 한국 전쟁 당시 납북되었다. 바로 밑의 친여동생 윤용희는 미국 유학 후 일제강점기에 잠시 국내에 입국했으나,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거주하였다.

그의 집안은 18세기 중엽까지 명문 양반가문이었다가 그 뒤 향반(鄕班)으로 몰락하였으나 증조 할아버지 윤취동이 지중추부사가 되고 조부 윤웅렬, 종조부 윤영렬무관으로 출세하여 중앙으로 진출하면서 다시 가세를 일으켰다. 그가 태어날 무렵 할아버지 윤웅렬윤치호는 개화파 정치인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2. 1. 2. 소년기

그는 어려서 한학을 배우다가 아버지 윤치호가 설립한 한영서원(송도고등학교의 전신)에 입학하여 영어와 낙농, 목축 과정을 수학했다. 1905년 어머니 마애방이 출산 중 산통으로 병원에 입원했다가 사망했다. 아버지 윤치호는 2년 뒤 할머니 전주 이씨의 중매로 남포 백씨 백매려와 재혼했다. 그 사이에 이복 형제, 여동생 6명과 남동생 3명이 태어났다. 이 중 윤기선은 피아니스트였고, 윤장선샌프란시스코 총영사관의 부영사와 총영사를 지냈다.

소년기에 그는 민비의 친족인 민유식(閔裕植)의 딸 민연희(閔蓮禧 또는 閔連嬉)와 결혼했다. 민연희에게서는 아들 영구(英求), 승구(勝求), 용구(容求)가 태어났다. 영구는 교통부, 승구는 대통령 윤보선의 비서, 용구는 서울특별시청의 공무원을 역임했다.

2. 2. 일제 강점기 활동

1923년부터 윤영선은 송도고등학교 부설 송고 농장(松高農場)과 송고 목장(松高牧場)을 경영했다. 그는 한영서원 재단 이사로서 재단 업무와 한영서원 부설 농장 및 목장 관리인을 겸했다. 아산과 개성에 있는 목장과 농원을 경영하면서 송도고보 농장과 목장의 운영, 관리감독도 겸임하였다.

1923년 1월 개성의 일본 경찰서에 목장사업 인가를 신청했으나,[6] 일본 경찰은 여러 핑계를 대며 인가를 내주지 않았다.[6] 아버지 윤치호는 일본인 목장을 보호하려는 의도[6]로 보았다. 그해 9월 개성에서 열린 조선부업품공진회(朝鮮副業品共進會)에 밀납(벌꿀에서 추출한 기름)을 출품하여 3등을 수상했다.[7]

1927년 6월 18일 과일 종자, 묘목 및 인삼 종자 묘목을 판매하는 주식회사 송도식산(松都殖産)의 설립에 참여하여 이사가 되었다. 1929년 2월 18일 공성학, 김정호 등과 면직물 및 양말 제조, 판매 회사인 주식회사 송고실업장(松高實業場) 창립에 참여하여 주주 겸 이사가 되었다. 10월 30일 송선주(宋善洙)와 함께 전등 및 전기선 제조 회사 장연전기 주식회사를 설립하고 공동대표로 출자하였다.

1929년 3월 개성군 송도면의 송도식산(松都殖産) 이사가 되었다. 이후 기업 경영과 주주로 활동했다. 같은 해 송고실업장(松高實業場)의 주식 340주를 매입하고 재단이사가 되었다. 9월 12일 송고실업장이 송도고등학교 부속기관에서 독립하여 주식회사로 설립될 때 공성학 등과 함께 취체역이 되었다. 감사역에는 백낙준, 최선익 등을 선정하고 대표직은 김정호에게 양보하여 사장으로 추대했다.

1931년 3월부터 1933년 3월 31일까지 황해도 장연의 전등, 전력공급 업체 장연전기(주)(長淵電氣(株))의 공동대표이사를 역임했다. 같은 해 3월 송고실업장 이사가 되었다.

1931년 이순신 사당과 위토 매각 위기 때 윤치호는 이충무공 유적지 보존 사업을 추진하였다. 윤영선은 10전, 윤일선은 20전을 기부하였다.[11] 1932년 5월 25일 평안남도 성천군 사가면 장림리에 설립된 자동차 운수업, 운송업 겸하는 평원운송(平元運送) 주식회사 감사로 선임되었다. 1932년 9월 23일 평양부 신창리 기생권번조합인 기성권번조합(箕城券番) 공동대표로 참여했다.

1932년 송도중학교 재단이사에 취임하고, 1933년 송도소학교(松都小學敎) 교장에 취임했다. 그해 6월 미국 남감리교 선교부 자금 지원 감소로 운영난에 처한 개성 제2송도보통학교 재정 문제를 김정호, 마종유와 함께 송도고보 재정유지 실행위원으로서 공성학과 함께 각각 1백원씩 기부하여 구제하였다. 1934년 4월 개성에서 개최된 전조선육상경기대회 계시부원과 기록부원을 겸하였다. 1934년 5월 11일 송도학원 재단설립 실행위원이 되었다.

1935년 4월 1일 송도식산 주식 100주를 매입하여 송도식산 이사이자 대주주가 되었다. 1935년 5월 8일 천안군 성환면 백석리 오지 방문 중 교통 불편을 보고 교량 가설 비용 3백원을 기부하였다.[13] 그해 7월 개성 언론사 고려시보(高麗時報)가 고려시보사(高麗時報社) 주식회사로 출범할 때 이사 겸 고문으로 위촉되었다. 격주간 고려시보를 일간 발행지로 변경하도록 자금을 지원했다.

1937년 12월 오른쪽 다리에 종기가 발생했다. 1938년 동생 윤광선이 광공업, 어업 투자 실패로 280000JPY의 빚을 지자, 아버지 윤치호와 함께 채무를 갚아주었다.

1939년 유일한 등이 설립한 유한양행 주주로 참여하였다. 1940년 조선 총독부의 창씨개명령에 따라 문중은 성을 '이토'(伊東)로 개명하였다. 윤영선도 이토 나가젠(伊東永善)으로 창씨개명하였으나, 별도 정치 활동 없이 농장, 목장, 양잠업에 종사하였다. 1940년 7월 주식회사 경인기업(京仁企業) 상무이사에 취임했다.

태평양 전쟁 추이를 관망하던 중 윤치영에게서 일본 패망 소식을 들었으나, 아버지 윤치호는 일본 승리 가능성도 언급하여 사태를 관망하였다. 1941년 윤치영 등에게서 이승만 출연 미국 방송 '미국의 소리' 단파 방송을 입수하여 시청하였다.

1941년 11월 7일 토목건축업 및 토지매매, 임대업을 하는 경인기업(京仁企業) 감사가 되어 1942년 8월 31일까지 재직했다.

2. 2. 1. 청년기, 유학 생활



아버지 윤치호는 국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실력을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한영서원에 낙농업, 목축, 양잠업, 경리회계 등의 교육을 도입했다. 그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한영서원(송도중, 고등학교의 전신)에 입학하여 농과를 지원, 농업과 낙농, 목축을 배웠다. 한영서원을 졸업한 뒤에는 1년간의 영어 과정을 추가로 수료하며 농장과 목장을 경영하다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1914년 한영서원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마운트 헤르몬 중학교에 입학했다. 1917년 마운트 헤르몬 중학교를 졸업하고 밴더빌트 대학 농업과에 입학했다. 그 해 10월 21일 다시 오하이오 주립 농업전문대학(the Ohio State College of Agriculture, 현 오하이오 주립 콜럼버스 오하이오 대학교의 전신) 농축산과에 입학했다. 아버지 윤치호는 그의 학교 동급생 루츠(Lutz) 등을 만나보기도 했다. 1922년부터는 오하이오 주립 농업전문대학교의 농림연구소의 연구보조원으로 입사, 근무했다.

미국 체류 중 아버지 윤치호는 그에게 3백 달러의 용돈을 연간 보냈다.[5] 1921년 7월 14일 목요일 일기에 미국 달러 3백 달러를 알렌(윤영선)에게 송금한다 했고, 1922년 4월 10일 월요일 일기에서 윤치호는 아들 알렌에게 미국 금화 1천 달러를 송금했다고 기록하였다. 300달러는 1922년 용돈이고, 700달러는 미국에서 한국으로 오는 경비라 한다.

1922년 6월 오하이오 주립 콜럼버스 오하이오 대학교 축산과를 졸업하였다. 미국 체류 중 그는 유일한 등과 연락하였다. 유일한이 있던 미시간주와 그가 있던 오하이오는 붙어 있었으므로 한국 유학생 모임에서나 대한인국민회일로 종종 만나 교류할 수 있었다. 1922년 7월 일본 요코하마에 체류하였고, 7월 26일 귀국했다. 귀국 이후 목장을 경영하였고, 경성 YMCA 청년회에 참여하여 YMCA 청년회 이사와 총무, 고려의약품주식회사 부사장 등을 역임하였다.

1922년 6월 귀국 직후 개성 고려청년회에 가입하여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2. 2. 2. 농장, 목장 경영

1923년부터 그는 송도고등학교 부설 송고 농장(松高農場)과 송고 목장(松高牧場)을 경영했다. 그는 한영서원 재단 이사의 한사람이 되어 재단의 업무를 맡는 한편, 한영서원 부설 농장과 목장의 관리인을 겸하였다. 아산과 개성에 있는 목장과 농원을 경영하면서도 송도고보에서 운영하는 송도고보 농장과 목장의 운영, 관리감독을 겸임하였다.

1923년 1월 개성의 일본 경찰서에 목장사업을 인가해달라는 신청서를 냈다.[6] 그러나 일본 경찰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인가를 내주지 않았다.[6] 그의 아버지 윤치호는 그들은 일본인 목장을 보호해 주고 싶었던 것[6] 이라 봤다. 그해 9월에는 개성에서 개최된 조선부업품공진회(朝鮮副業品共進會)에 밀납(蜜蠟, 벌꿀을 추출해서 만든 기름)을 출품하여 3등을 수상하기도 했다.[7]

1927년 6월 18일에는 과일 종자, 묘목 및 인삼 종자 묘목을 판매하는 주식회사 송도식산(松都殖産)의 설립에 참여하여 이사가 되었다. 1929년 2월 18일 공성학, 김정호 등과 면직물 제조 판매와 양말 제조 판매를 하는 주식회사 송고실업장(松高實業場)의 창립에 참여하고 주주 겸 이사로 참여했다. 10월 30일에는 장연군 장연면 읍내리에서 송선주(宋善洙)와 함께 전등 및 전기선 제조 회사 장연전기 주식회사를 설립하고 공동대표로 출자하였다.

2. 2. 3. 기업경영, 주주, 사회 활동

1929년 3월 개성군 송도면의 송도식산(松都殖産) 이사가 되었다. 이후 기업 경영과 주주로 활동했다. 1929년 면직물과 메리야스를 제조 판매하던 회사인 송고실업장(松高實業場)의 주식 340주를 매입하고, 그해 송고실업장의 재단이사의 한 사람으로 취임했다. 그해 9월 12일 송고실업장이 송도고등학교 부속기관에서 독립하고 주식회사 송고실업장(松高實業場)으로 설립될 때 공성학 등과 함께 취체역의 한 사람으로 취임하였다. 이어 감사역에는 백낙준, 최선익 등을 선정하고 대표직은 김정호에게 양보하여 그를 사장으로 추대했다.

1931년 3월부터는 황해도 장연의 전등, 전력공급 업체 장연전기(주)(長淵電氣(株))의 공동대표이사로 1933년 3월 31일까지 재직했다. 그해 3월 송고실업장 이사가 되었다.

1931년 이순신의 사당과 위토가 매각위기에 처하자 윤치호는 이충무공 유적지 보존 사업을 추진하였다. 윤영선은 여기에 10전을, 윤일선은 20전을 각각 기부하였다.[11] 1932년 5월 25일 평안남도 성천군 사가면 장림리에 설립된 자동차 운수업과 운송업을 겸하는 평원운송(平元運送) 주식회사의 감사로 선임되었다. 1932년 9월 23일 평양부 신창리의 기생권번조합인 기성권번조합(箕城券番)의 공동대표로 참여했다.

1932년 송도중학교 재단이사에 취임하고, 1933년 송도소학교(松都小學敎)의 교장에 취임했다. 그해 6월 미국 남감리교 선교부로부터 자금 지원이 줄어들어 운영난에 처한 개성 제2송도보통학교의 재정문제를 구제하였다. 바로 김정호, 마종유와 함께 송도고보 재정유지 실행위원의 한 사람이 되어 공성학과 함께 각각 1백원의 기금을 기부하였다. 1934년 4월에는 개성에서 개최된 전조선육상경기대회 계시부원과 기록부원을 겸하였다. 1934년 5월 11일 송도학원 재단설립 실행위원의 한 사람이 되었다.

1935년 4월 1일 송도식산의 주식 100주를 매입하여 송도식산의 이사이자 대주주의 1인이 되었다. 1935년 5월 8일 천안군 성환면 백석리의 오지를 방문했다가 교통편이 불편한 것을 보고, 교량 가설 비용 3백원을 기부하였다.[13] 그해 7월 개성의 언론사인 고려시보(高麗時報)가 독자적 재단으로 출범, 고려시보사(高麗時報社) 주식회사가 설립되자 고려시보사 이사 겸 고문으로 위촉되었다. 이어 격주간으로 발행되던 고려시보의 발행을 일간 발행지로 변경하게끔 자금을 지원하였다.

2. 2. 4.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 전후

이후 송고실업장과 송도식산의 회사 업무에 관여하였다. 1937년 12월 오른쪽 다리에 종기를 앓게 되었다. 1938년에는 동생 윤광선이 광공업, 어업 투자에 실패하고 280000JPY의 빚을 지자, 아버지 윤치호와 함께 동생 광선의 채무를 대신 갚아주었다.

1939년 유일한 등이 설립한 유한양행의 주주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1940년 조선 총독부에 의해 창씨개명령이 떨어지자 그의 문중은 성을 '이토'(伊東)로 개명하였다. 그도 문중을 따라 이토 나가젠(伊東永善)으로 창씨개명하였다. 그러나 별도의 정치적 활동에는 참여하지 않고 농장과 목장, 양잠업에 종사하였다. 1940년 7월 주식회사 경인기업(京仁企業)의 상무이사에 취임했다. 그 밖에 목장과 농장을 경영하기도 했다.

태평양 전쟁의 추이를 관망하던 중 윤치영으로부터 일본이 반드시 패망하리라는 소식을 접하였으나, 아버지 윤치호로부터 일본이 패망할 수 있지만 일본이 승리할 수도 있다는 말을 듣고 사태를 관망하였다. 1941년 윤치영 등으로부터 이승만이 출연한 미국 방송 '미국의 소리' 단파 방송을 입수하여 시청하였다.

1941년 11월 7일 토목건축업 및 토지매매, 임대업을 하는 경인기업(京仁企業)의 감사가 되어 1942년 8월 31일까지 재직했다.

2. 3. 광복 이후

1945년 개성에서 주식회사 고려제약(高麗製藥)에 입사, 8월 광복 직후 고려약품주식회사(高麗藥品株式會社) 전무 취체역(專務取締役)이 되었다. 광복 이후 아버지 윤치호친일파로 지목되었으나, 곧 사망했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그는 불이익이나 제한을 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해방 정국에서 그는 정치적인 발언이나 행동은 자제하였다.

1946년 3월 29일 고려제약위생회사 부사장에 취임했고,[14] 9월 22일 서울 남대문에서 군정청 상무부장 오정수(吳禎洙), 서울시 군정관 제임스 윌슨(James E. Wilson) 등의 주도로 열린 남대문 자유시장 개장식에 사회자로 참석하였다.[15] 그는 송도소학교의 업무와 고려제약 경영, 개성 송도면과 아산 둔포면을 오가며 목장과 돼지 농장을 경영하였다. 그밖에 고려청년회와 고려청년회 주최 개성씨름대회에 전념하였다.

1948년부터 개성 지역 유지들의 공의로 개성시내에 약학대학을 유치하려 하자, 윤영선은 공성학 등과 약학대학 유치 운동을 추진했다. 그해 10월 그는 개성 송도면에 있던 시가 300만 상당 자신의 토지 5만 평을 기부하여 솔선을 보였다.[16][17] 그러나 곧 6.25 전쟁의 발생으로 개성시내 약대 유치 운동은 실패하고 만다. 1949년 10월 26일 대한적십자사 대의원 6명 중 한 명으로 위촉되었다.

1952년부터 쌀 생산량 부족으로 이승만 정권에서 주조금지법 제정과 엿 제조 금지법을 건의하였다. 그는 "막걸리는 농민의 양식이니까 말썽이 많을 테지만 쌀을 깎을대로 깎아가지고 만드는 정종 과 함께 양조 금지를 하고, 또 구호물자로 들어오는 설탕을 골고루 지방에도 배분하여 당분을 취하자고 만드는 엿 제조 금지법을 아울러 제정하면 낭비되고 있는 쌀을 절약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20]

그는 장관이나 차관을 바꾼다고 해서 쌀값이나 물가가 안정된다고 보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술을 만들지 못하게 해봤자 그것이 제대로 되지 않을 것 같다고 의심하면서, 우선 정부에서 쌀을 팔되 시민들에게 골고루 간편하게 분배되도록 각 동회(동사무소)를 통해서 파는데 생길 수 있는 폐단이 지금 방식의 폐단보다 적으리라"고 주장하였다.

2. 3. 1. 광복 직후

1945년 개성에서 주식회사 고려제약(高麗製藥)에 입사, 1945년 8월 광복 직후 고려약품주식회사(高麗藥品株式會社) 전무 취체역(專務取締役)이 되었다. 광복 이후 아버지 윤치호친일파로 지목되었으나, 윤치호는 곧 사망했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그는 불이익이나 제한을 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해방 정국에서 그는 정치적인 발언이나 행동은 자제하였다.

1946년 3월 29일 고려제약위생회사 부사장에 취임했다.[14] 9월 22일 서울 남대문에서 군정청 상무부장 오정수(吳禎洙), 서울시 군정관 제임스 윌슨(James E. Wilson) 등의 주도로 열린 남대문 자유시장 개장식에 사회자로 참석하였다.[15] 그는 송도소학교의 업무와 고려제약 경영, 개성 송도면과 아산 둔포면을 오가며 목장과 돼지 농장을 경영하였다. 그밖에 고려청년회와 고려청년회 주최 개성씨름대회에 전념하였다.

1948년부터 개성 지역 유지들의 공의로 개성시내에 약학대학을 유치하려 하자, 윤영선은 공성학 등과 약학대학 유치 운동을 추진했다. 그해 10월 그는 개성 송도면에 있던 시가 300만 상당 자신의 토지 5만 평을 기부하여 솔선을 보였다.[16][17] 그러나 곧 6.25 전쟁의 발생으로 개성시내 약대 유치 운동은 실패하고 만다. 1949년 10월 26일 대한적십자사 대의원 6명 중 한 명으로 위촉되었다.

2. 3. 2. 양조금지법과 엿제조 금지법

1952년부터 쌀 생산량 부족으로 이승만 정권에서 주조금지법 제정과 엿 제조 금지법을 건의하였다. 그는 "막걸리는 농민의 양식이니까 말썽이 많을 테지만 쌀을 깎을대로 깎아가지고 만드는 정종 과 함께 양조 금지를 하고, 또 구호물자로 들어오는 설탕을 골고루 지방에도 배분하여 당분을 취하자고 만드는 엿 제조 금지법을 아울러 제정하면 낭비되고 있는 쌀을 절약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20]

그는 장관이나 차관을 바꾼다고 해서 쌀값이나 물가가 안정된다고 보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술을 만들지 못하게 해봤자 그것이 제대로 되지 않을 것 같다고 의심하면서, 우선 정부에서 쌀을 팔되 시민들에게 골고루 간편하게 분배되도록 각 동회(동사무소)를 통해서 파는데 생길 수 있는 폐단이 지금 방식의 폐단보다 적으리라"고 주장하였다.

2. 4. 생애 후반

1968년 1월 연세대학교 박물관에 아버지 윤치호 및 할아버지 윤웅렬의 유품과 관복, 교지 등을 기부하였다.[23] 1975년 5월 2일 서울의 뉴서울호텔에서 곽상훈, 박종화, 모윤숙, 안호상, 이병도, 이갑성 등과 함께 "구국선언문"을 낭독하고 구국동지회(救國同志會)의 창립 발기에 참여하였다.

1970년대에는 아버지 윤치호의 일기 및 유품을 사회에 기증하였으며, 1980년에는 김형찬과 함께 윤치호의 편지 서신을 학계에 기증하였다.[24] 이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부분 번역, 해독하여 한글로 번역, 간행되었다.

1982년 송도학원이 경영난에 처하자 개성 출신 기업가 이회림(李會林)에게 재단을 넘기고 은퇴하였다. 그해 12월 4일 국민교육헌장 선포 10주년 기념 교육유공자 표창 때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이후 계묘구락부와 YMCA의 원로 모임에 출석하여 활동하였다. 1988년 2월 6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견지동 자택에서 노환으로 사망했다. 향년 92세였다.

2. 4. 1. 사회 사업

1956년부터 흥사단에서 주최하는 금요강좌의 연사로 초빙되었다. 그해 4월 20일에는 대성빌딩에서 "미국의 농촌청소년 지도"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였다. 1957년 농업은행(농협의 전신) 중앙회의 운영위원에 선임되어 농촌 영농자금 공급의 불합리성을 시정하였다. 1957년 4월 농업은행 설립위원회 운영위원에 임명되었다.[21]

1957년~1958년 서울 로터리클럽 회장에 취임하여 한국 로터리 재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활동, 공로를 남겼다. 그 뒤 서울 YMCA 청년회 총무를 거쳐 1958년~1959년 YMCA 청년회 총무를 역임하였다. 그 뒤 YMCA 총무에 재선되었다가 1960년 사퇴했다.[22] YMCA 기독교 청년회 총무가 되어서는 건물부지 마련을 위해 기탁금을 기부하여 종로 3가의 건물을 짓도록 도와주었다.

1958년 3월 25일 농촌은행설립위원회 운영위원, 4월 1일 농업은행(농업협동조합 중앙회의 전신) 민간부문 운영위원에 위촉되어 농촌 영농자금 지불 조건을 완화시키고, 영농자금 공급의 각종 불합리성을 시정케 하였다. 1959년 10월 YMCA 재단 회장이 되었다.

1960년 이후 보이스카우트 활동에도 참여하여 한국 청소년의 지도 육성에 헌신하였으며, 4월 19일 4.19 혁명 때는 학생들에 대한 정부의 관대한 처분을 호소하기도 했다. 1960년대 이후 4H클럽중앙위원회 회장, 대한적십자사 비서실장을 역임하였으며, 학교법인 송도학원 이사장으로 재직하였다.

2. 4. 2. 은퇴와 최후

1968년 1월 연세대학교 박물관에 아버지 윤치호 및 할아버지 윤웅렬의 유품과 관복, 교지 등을 기부하였다.[23] 1975년 5월 2일 서울의 뉴서울호텔에서 곽상훈, 박종화, 모윤숙, 안호상, 이병도, 이갑성 등과 함께 "구국선언문"을 낭독하고 구국동지회(救國同志會)의 창립 발기에 참여하였다.

1970년대에는 서서히 아버지 윤치호의 일기 및 유품을 사회에 기증하였으며, 1980년에는 김형찬과 함께 그동안 소장하고 있던 윤치호의 편지 서신을 학계에 기증하였다.[24] 이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부분 번역, 해독하여 한글로 번역, 간행되었다.

1982년 송도학원이 경영난에 처하자 개성 출신 기업가 이회림(李會林)에게 재단을 넘기고 은퇴하였다. 그해 12월 4일에는 국민교육헌장 선포 10주년 기념 교육유공자 표창 때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받았다. 이후 계묘구락부와 YMCA의 원로 모임에 출석하여 활동하였다. 1988년 2월 6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견지동 46번지 자택에서 노환으로 사망했다. 사망 당시 나이는 향년 92세였다.

3. 상훈 경력

4. 가족 관계

관계이름출생사망비고
할아버지윤웅렬(尹雄烈)1840년 음력 4월 17일1911년 양력 9월 22일대한 제국 군무 대신, 법무 대신 역임
할머니전주 이씨(全州李氏)1844년 9월 27일1936년 2월 12일이정무
고모윤경희(尹慶姬)1862년1931년
서조모김정순(金貞淳)1879년 3월 15일1959년 11월 16일
이복 삼촌윤치왕(尹致旺)1895년 2월 17일1982년 12월 21일육군 의무감 역임
이복 삼촌윤치창(尹致昌)1899년 3월 5일1973년 10월 1일영국공사 역임
아버지윤치호(尹致昊)1865년 1월 16일1945년 12월 9일귀족원 조선·대만 칙선 의원, 조선 총독부 중추원 고문 역임
어머니진주 강씨(晉州 姜氏)1868년1886년아버지 윤치호의 본처
생모마애방(馬愛芳)1871년 2월 19일1906년 2월 14일중국인
누나윤봉희(尹鳳姬)1894년 12월 31일?로나(Launa)
매형김긍선(金兢善)??소학교 훈도 역임
동생윤봉성(尹鳳成)1897년요절
동생윤광선(尹光善)1898년 11월 17일1950년(?)샌들러(Candller)[26], 6·25 전쟁 중 납북, 남궁억의 사위
제수남궁자경[25]1896년?독립운동남궁억의 딸
조카딸윤정희
조카사위채동규서울대학교 약대 학장, 대한 약학회 회장 역임
조카딸윤성희1929년2013
조카사위원석연(元錫淵)1922년2003년 11월 5일화가
여동생윤용희(尹龍姬)1903년?헬렌(Helen)
매제백OO
외조카백연숙
계모백매려(白梅麗)1890년 8월 1일1943년 4월 30일
이복 동생윤장선(尹璋善)1920년2005년 3월 25일워싱턴[26], 전(前) 미국 샌프란스시코 총영사관
이복 제수기세선[25]1922년2007년 9월 28일[27]
조카윤원구[28]
조카딸윤인경윤장선의 셋째 딸
조카딸윤효진(尹孝珍)1958년대한민국 국가대표 피겨스케이트 선수
이복 여동생윤문희(尹文姬)1907년 9월 18일?마리(Mary), 정광현(鄭光鉉) (서울대학교 법대 교수)과 결혼
이복 매제정광현(鄭光鉉)1902년1980년 12월 7일법의학자, 호는 설송(雪松)
이복 여동생윤무희(尹武姬)1912년 5월 4일1914년 3월 10일
이복 여동생윤은희(尹恩姬)1917년 11월 11일?
이복 매제정봉섭(鄭奉燮)1912년?의학박사, 산부인과 의사
이복 여동생윤명희(尹明姬)1918년 2월 8일2013년 10월 30일미국 버지니아주에서 사망 (장지: Fairfax Memorial Park, Section 6, Garden of Serenity)
이복 매제조인호(趙麟鎬)??
외조카조원효
외조카조영숙1940년
외조카조명숙
이복 동생윤기선(尹琦善)1921년 10월 22일2013년 7월 27일
이복 제수이순복
조카딸윤경숙[29]
조카사위노춘규미국 거주, 의사
조카딸윤영숙첼리스트[29]
이복 여동생윤보희(尹寶姬)1923년 10월 19일이화여자대학교 음대 교수
이복 매제현영학(玄永學)1921년2004년 1월 14일기독교 민중신학자, 이화여자대학교 문리대학장[30][31][32]
이복 여동생윤영희(尹瑛姬)1926년 3월 5일미국 거주
이복 여동생휘스넌트(Whisnant)미국인
이복 동생윤정선(尹挺善)1928년2008년 3월 4일요셉[26], 미국에서 사망
이복 제수김영주[25]이승만 대통령의 주치의 김승현(金承鉉)의 둘째 딸[33]
이복 여동생윤정희
아내민연희(閔蓮禧)1895년 3월 27일1950년 7월 20일민비의 친족인 민유식(閔裕植)의 딸
첫째 아들윤영구(尹英求)1923년 9월 17일1991년 3월 8일메트로 항공사 사장, 회장 역임
맏며느리한경복(韓慶福)
첫째 손녀윤순명(尹旬明)
맏손녀 사위방상훈(方相勳)1948. 2. 6~조선일보 사장 역임
손녀윤재명(尹在明)
손녀사위신희철(申熙澈)1947.05.16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재직
손녀윤서명(尹瑞明)미국거주
손녀윤영(尹瑛)
손녀 사위송기섭(宋棋燮)
둘째 아들윤승구(尹勝求)1924년연희전문학교 졸업, 윤보선 대통령 비서관 역임
둘째 며느리김정옥(金貞玉[34])독립운동가 겸 교육자 김명신의 딸
손녀윤정화
셋째 아들윤용구(尹容求)공무원, 서울특별시청 총무과 근무
셋째 며느리이름 미상
후처김명주(金明珠)1906년 5월 20일1981년7월 25일묘는 석곡리 선영 근처, 강릉 김명신(金明信)의 딸
장인민유식(閔裕植[35])??명성황후의 친족
사돈방응모(方應謨)1883년 9월 29일1950년 8월?



가족 사진, 좌로부터 윤영선, 윤웅렬, 윤치호, 윤봉희 순


6촌 동생 윤보선 (대한민국의 제4대 대통령을 지냈다.)

5. 기타

비슷한 시기에 그와 한자 이름이 같은 동명이인 윤영선이 있었다. 그는 일제강점기에는 완도군, 광주부, 광산군의 공무원이었고, 해방 후에는 전라남도 해남군 출신으로 광주시(광주의 광역시 승격 이전)의 공무원, 광주시장, 흥국해운(興國海運) 사장, 제2대 국회의원(해남군 지역구)으로 활동하였다.

참조

[1] 웹사이트 윤치왕(尹致旺) http://people.aks.ac[...] 2023-10-28
[2] 웹사이트 윤치소(尹致昭) http://people.aks.ac[...] 2023-10-28
[3] 웹사이트 대통령·장관·서울대총장…대이어 ‘지배 엘리트’ https://www.hani.co.[...] 2009-08-14
[4] 웹사이트 '3·1운동도 비난'…문창극이 옹호한 '친일파' 윤치호 https://www.nocutnew[...] 2023-10-27
[5] 서적 유일한 평전 작은씨앗 2005
[6] 서적 윤치호 일기:1916-1943 역사비평사 2001
[7] 뉴스 개성의 부공 수상자 동아일보 1923-10-29
[8] 뉴스 윤씨저에 절도 동아일보 1924-12-29
[9] 뉴스 매일신보 1925-09-17
[10] 뉴스 社告 동아일보 1925-04-17
[11] 뉴스 충무공유적보존문제로 추모의결정체성 금답지 동아일보 1931-07-22
[12] 뉴스 개성제일송보 윤영선씨가 경영 동아일보 1934-03-07
[13] 뉴스 교량가설비로 윤씨가 삼백원 동아일보 1935-05-08
[14] 뉴스 人事 자유신문 1946-03-29
[15] 뉴스 自由市場 개장식 자유신문 1946-09-22
[16] 뉴스 개성약학대학창립 김, 윤,공 삼씨의 특지로 동아일보 1948-10-17
[17] 뉴스 송도약대의 발족에 서광 조선일보 1948-10-07
[18] 간행물 한국양정사 농수산부 1978
[19] 뉴스 農改 위원 명부 자유신문 1950-03-24
[20] 뉴스 장관을 가라본댓자 쌀값 해결엔 별수없다 동아일보 1952-03-05
[21] 뉴스 이명은 즉사, 시내에 윤화사건 동아일보 1957-09-09
[22] 서적 자화상을 그리듯이 1 범우사 1997
[23] 뉴스 고 윤치호씨 소장품 연대 박물관에 기증 경향신문 1968-01-11
[24] 뉴스 격동기 구한말 재조명 윤치호 미공개서신등 180여점 발견 경향신문 1980-09-30
[25] 서적 윤치호 일기:1916-1943 역사비평사 2001
[26] 서적 윤치호 일기:1916-1943 역사비평사 2001
[27] 문서 미국 캘리포니아 LA에서 사망
[28] 뉴스 "[부고] 金世容 전 안성상공회의소 회장 별세 外" http://article.joins[...] 중앙일보 2004-03-29
[29] 뉴스 7월 30일 궂긴 소식 http://www.hani.co.k[...] 한겨레신문 2013-07-29
[30] 웹사이트 https://www.christia[...]
[31] 웹사이트 https://archive.toda[...]
[32] 웹인용 교수신문 http://www.kyosu.net[...] 2013-05-16
[33] 서적 성공하나 아픔은 아홉 출판사 금토 1996
[34] 문서 서울대학교 음대 제1회 졸업생
[35] 서적 윤치호 일기:1916-1943 역사비평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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